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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부여 받은 인생의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이제 와서 뒤늦게 후회하는 중 // 관심사 : 음악, 독서, 여행, 운동, 유튜브, 일본애니 // Since October, 2019
by RealEscape


[잡글] 2019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되돌아보며 2019년도_일상

어딘가의 평행세계에서는 책가방을 맨 나의 그림자가 저렇게 보일까
그 평행세계의 내 자신은 지금의 나보다 더 행복한 인간일까

# 01

한 두 차례의 겨울비가 갑작스럽게 지나가고 나선 살갗에 닿는 공기가 더 냉랭해진 것을 느낀다. 살을 뺀답시고 웃통 벗고 영하 20도에서 뛰어다니던 3년 전 군복무 시절의 패기는 내복바라기인 지금 현실 속에선 흔적조차 희미하다. 패기 부리고 자존심 내세우다가 감기 걸린다고 누가 도와줄 것도 아니고. 내복에 털잠바까지 완전 무장은 덤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얼마 전까지 입던 스웨터 대신 하얀 짧은 티와 그 위에 초록색 니트, 기모가 들어간 청바지를 입었다. 옷걸이가 된 육체는 볼품 없어도 옷 자체는 말끔하니 좋아보인다. 

제대를 하고 나서는 말끔한 가디건, 니트 같은 옷들이 더 좋아지고 향수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었다. 생긴게 따라주지 않으니 말끔하게 입고 향이라도 좋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궁여지책인 셈이다.

나이 어린 패기 하나 믿고 그 시절엔 일일히 지각하지 않고 지나쳤던 것들을 하나하나 의식하고 챙기는 내 자신을 보며, 확실히 학부생이던 20대 시절보다는 나이가 들었다는 웃픈 생각이 지나갔다. 아직 속 내용물은 엄살쟁이에 이기적인 초딩이 따로 없는데.


# 02

더워지고 추워지고, 계절에 따라 옷이 바뀌지만 쉽사리 바뀌지 않는 나만의 패션이 있다, 그것은 바로 책가방과 헤드폰. 

보통 직장을 다니는 분들처럼 노트북 케이스안 서류가방 등을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데다가, 청바지에 우윳살이 채 빠지지 않은 포동포동한(?) 얼굴상 때문에 지금도 지나가다 길 묻는 사람들은 나에게 "학생"이라는 회춘(???) 어린 호칭을 선사한다. 

책가방에는 정말 학부생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무슨 쌀짐 지고 다니냐는 타박을 밥 먹듯이 들었을 정도로 많은 것을 넣고 다녔다. 쌀배달 아르바이트 같은 일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원체 메고 다니는 짓을 많이 해와서 정말로 빠른 적응력을 보일지도?? 

지금은 그래도 그 시절보다는 내용물의 부피는 많이 줄어들었다. 넣고 다니는 건 주로 읽을 책, 블루투스 키보드와 태블릿, 충전기, 펜, 휴대폰 거치대 이외 자잘한 것들 등등. 뭐야 적고 보니 아직도 많네. 그냥 노답이구만.


# 03

그러고보니 좀 있으면 이제 말년차인 내과 레지던트 3년차로 승급 예정. 우뢰와 같이 쏟아지는 콜들, 포화와도 같은 경고알람음이 고막과 멘탈을 터뜨릴 기세로 울리고, 피와 오물이 여기저기 난무하는 수많은 병상들을 공간으로 한 전투들을 치뤄온 느낌. 

이러한 각 병상들에서의 크고 작은 전투들이 모여 지난 2년 간의 나름 파란만장한 전쟁사가 탄생했다. 아직도 진행형인 것은 함정.

학부생 졸업 직후 내가 처했던 현실은, 병원에 끌려가 인턴으로 근무하느라 졸업식에 참가하여 그 흔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외울 기회도 내게 주지 않았고, 힘겹게나마 군대에서 조금은 사람답게 만들어놓은 나의 심신을 지난 2년 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다시 깎아내렸다. 

학부생 시절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 한 차원을 낮춘 2차원의 세계에 거주하던 이전의 자신이 본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게 나만의 판타지 세계 속에서 부유하던 내 자신은 학부 졸업 후 가차없이 꺼내져서 현실에 내동댕이 쳐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별별 잡상들이 떠올랐다 - 배고프고 졸리고 힘든 것은 기본 옵션이었고 내가 왜 이걸 택했지, 왜 이걸 하고 있지, 나는 뭘 하고 싶은지와 같은 잡스러운 고민이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잡스럽게 시작된 고민이 확장되어 조금씩 사는 목적이나 의미를 궁구하다보니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에 대한 가이드로써 철학과 미학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서투르게나마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절실하게 체감한 몇 가지 깨달음이 있다. 

 - 내 자신은 전혀 대단한 존재가 아니고 생각보다 매우 작은 존재라는 것.
 - 비가역적이고 일회성이라는 한계의 특성상 완벽한 인생은 불가능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생은 필히 비극이라는 것. 
 - 행복이란, 지금 현재라는 순간에 충실할 수 있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때에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

그래서 저런 깨달음들과 내 자신이 가진 여러 콤플렉스들로 인해, 지금의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단연코 말할 수 있다.


# 04

앞으로도 그렇게 무너져 내린 심신을 이끌고 오프가 되면,나는 헤드폰을 낀 채로 가방을 메고 책을 읽으러 우두커니 카페로 향할 것이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학부생 때 애니를 보고 게임을 하던 시절과는 좀 다르긴 해도 온전히 나만의 세계에 빠질 수 있는 좋은 매개체이다. 오늘은 어디서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음악을 들을까. 

덧글

  • 2019/12/06 21:2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RealEscape 2019/12/07 00:17 #

    흔히들 시간에 따른 성장 스토리를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현실에 대해 타협해 가는 과정으로 많이 생각하고 묘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어리던 시절에 상상하던 세상과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인 것도 너무 당연하구요.

    레지던트 수련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살아남으려면 실력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분리되지 못한다면 그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능력과 기량을 쌓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해답이겠지요.

    문제는 그 능력과 기량이 항상 노력에 비례해서 정직하게만 우리들에게 돌아오진 않는다는 것이겠죠. 어렵고도 기이하면서 가끔 터지는 재밌는 일들을 안주와 버팀목 삼아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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